페이퍼 플랜
4차선 도로가 길게 쭉 뻗어있다. 주거지구를 조금만 지나면 나름대로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한적한 길가가 쭉 뻗어있다. 그 옆 보도를 걸어볼 수 있다. 그렇게 가다보면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 아래의 하천까지의 높이가 상당하다. 하천에서 물고기를 봤다는 증언은 많이 들렸지만 최근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들다. 다만 하천이라고 부르기엔 하천 주변의 지형이 지나치게 움푹 패여있고 하천 위에는 상당한 규모의 도로가 여럿 교차하며 지나고 있었다. 물길을 따라서 자전거길과 도보가 있으며 가로등이 있고 벤치가 있다. 가로수들은 풍성함과 앙상함 그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라곤 없는 미묘한 인상을 유지하고 있어 설사 우수한 지오게서 유저라고 해도 이 곳이 어디인지 쉽게 짐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 하천의 옆에는 카페들과 유사 카페들이 쭉 늘어서 있는데 그것들이 나름대로 꾸며놓은 모습을 보았을 때 민혁의 입장에서 그것들은 여전히 큰 감흥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나름대로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미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살아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그는 미술관에서 보아왔던 전시품보다 하천 가에 전시되어 있는 이 미술품들이 더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눈 앞의 녹색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카페에는 먼저 도착해 있는 3명의 사람들이 있다. 새삼스럽지만 민혁은 그들과 처음 모임을 시작했을 때를 상기해본다.
'토익 공부를 하자!'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이 네 사람은 모였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 같은 동아리, 그냥 아는 친구 등 마치 수갑같은 1대1 연결고리가 이 소속감이라곤 없는 네 사람을 모이게 했다. "너희들이 공부하고 싶다고 말한 거니까 안나오면 죽어!" 라고 종석이 말했다. 카페 유리창 밖으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카페 안은 넓고 테이블은 거리가 멀었으나 내부는 은근히 소란스럽고 번잡했다. 종석은 아이스브레이킹으로 대뜸 예진의 친구라고 하는 사람에게 "너는 왜 그렇게 웃긴, 이상한 옷을 입고있는거냐"며 지적을 하자 그 여자애는 "그건 제 어필입니다!" 라고 말했다. 선미는 첫 만남과는 다르게 다음 모임부터는 어두운 톤의 블레이저를 입고 다닌다. 그녀를 3주 동안 보면서 알게 된건 그녀가 잘 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 중에서 가장 자주 늦게 오는 친구는 예진이다. 예진이 오지 않을 때 선미는 그녀가 오지 못하는 이유를 평균적으로 3개 이상 들어서 자신의 친구를 변호하고자 했다. 그 추론중에서 하나가 들어맞을 확률은 대략 반반이었다.
그들은 영어 단어와 숙어를 외워와야 했다. 행동대장인 종석은 항상 거의 모든 단어와 숙어를 암기해왔다. 선미와 예진은 80% 정도 암기를 해오는 것 같았다. 그들 중에서 가장 단어를 외워오지 않는 사람은 민혁이었다. 민혁은 오늘도 단어를 거의 외우지 않았다. 종석은 매번 민혁에게 실망했고 결국 그의 멱살을 잡기에 이르렀다. 카페의 몇몇 손님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
"저기. 그만해요. 우리 또 쫓겨나겠어. 예전에 선미때문에 한번 나가게 되었잖아요. 그러면 2아웃임."
그 당시를 설명해보자면 선미는 무표정한 얼굴로 브레이저를 입은 체로 "이건 저의 어필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민혁을 노려봤다. 그녀의 손에는 꽤 작은 크기의 칼 3개가 손등 밖을 바라보도록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어있었고 그녀는 그 오른손을 쥐고서 뒷통수로 가져간 다음 빠르게 앞으로 내밀어서 민혁을 향해 나이프들을 던졌다. 민혁은 그 칼들을 피했지만 그 뒤에있던 카페 안의 다른 사람이 거의 맞을 뻔 했다. 나중에 민혁이 왜 그랬냐고 선미에게 묻었고 선미는 그 질문에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예진아. 얘도 한두번이어야지. 다른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공부하고 단어, 숙어 뿐만이 아니라 영어 문장까지 암기해서 오는데 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잖아!"
"그렇지만 이건 과도해요."
"잘못한 것에 대해서 이정도도 간섭하면 안돼? 자기야. 아니..."
민혁은 놀라서 종석을 보았다.
"그게 너희 둘에게 있었던 어필인건가."
"어.. 음. 형. 언제부터 사귀셨어요?"
"아.. 사귀는 건 아니고."
선미가 화를 내면서 말했다.
"사귀는게 아니라면 자기야 같은 말은 쓰지 않는다고요!"
"아. 그게.. 그런게 있었어."
종석은 둘이 사귀게 되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게 말할 타이밍을 놓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민혁은 들으면서도 의아했다. "근데 진짜 사귀어요?"
"거짓말이겠냐?"
"너무 의외인데요."
그 말대로였다. 예진은 우리 넷 중에서 가장 말이 없었다.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눈의 촛점도 흐릿했다. 늘 조용했지만 활기차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장 자주 공부중에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에 갔다거나, 전화통화를 했다거나 하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소심한 사람이라면 분명 그녀를 찾을 사람도 있을리가 없다... 고 민혁은 멋대로 추론했었다. 그런데 종석과 예진이 왜?
선미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우리 토익스터디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놀라운 일이에요." 양쪽 눈섭을 들어올렸다. "미스테리하네요."
문제풀이가 끝나고 종석은 말했다.
"다들 처음보다는 실력이 늘은 것 같아. 옛날에는 진짜 문제만 풀어도 점수가 오르는게 토익이었지만 요즘에 나오는 신유형들은 점점 더 어렵고 악랄해져가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멈추고 싶지 않아. 나는 토익 시험을 잘 보고 싶은 것을 넘어서 영어를 잘하고 싶어. 그렇지만 영어를 잘하는 것은 쉽지 않지. 얼마전에 나는 유튜브에서 유명한 외국인 연예인이 하는 말을 들었어. 한국인들은 영어를 충분히 공부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주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다 라고. 우리가 한국말을 자주 사용함으로서 한국어에 능숙해진 것 처럼, 영어도 자주 사용해야 결국 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 우리는 영어를 늘 체득하게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아. 그게 바로 나의 플랜이야."
종석은 책상에 놓여있는 자신의 영어노트를 만진다. 그 노트의 표지에는 페이퍼 플랜이라고 적혀있다. 민혁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한다.
민혁은 말했다. "그 플랜이라면...."
"그래. 그 플랜, 계획은 우리 넷이 같이 이루어가는거야.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여럿이 힘을 뭉치면 안될 것도 없지. 물론 민혁. 너는 조금 더 노력해야해. 하지만 전에 비해서 확실이 오답이 줄었어. 그러니까 각자 분발하자고."
그때 선미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셋이 그녀를 쳐다본다.
"그 말은 왠지 뻔하지만 진심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나름대로 감동을 표현하고 싶고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저의 어필입니다!"
민혁이 말했다.
"그 어필이라면...."
2주일이 더 지났을 때였다. 그들은 토익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완전히 소심했던 예진은 이제는 얼굴에 표정을 풀었다. 조금은 더 긴장이 풀린 눈치인지 우리에게 농담도 하였고 확실히 더 적극적이 되었다. 카라멜 마키아토를 한모금 마신 그녀는 카페 창 밖의 하늘을 보면서 산책로 위의 대기의 온도와 공기의 움직임, 빛의 산란과 그것이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하천의 표면의 흐름에 대한 에세이를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세세한 묘사에 대해서 나머지 셋은 각자의 능력껏 감상하고 이해를 했다.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때 종석은 들어가는 손님의 어깨를 부딧혔고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페이퍼플랜은 땅 바닥에 떨어졌다. 아마도 그것이 예뻐보였나보다. 그것을 길고양이가 입에 물고는 도망가기 시작했다. 선미가 단도들을 실컷 그 고양이에게 던졌지만 소용없었다. 고양이는 보도를 따라 다리 위로 뛰었다. 고양이를 뒤따라가던 종석은 고양이를 결국 잡았으나 그 직전 고양이는 입에 물고 있던 공책을 다리 밖으로 던졌다. 뒤에서 보고있던 예진은 당황했다.
"노트 잃어버렸다고 시험을 망치는 건 아니지?" 선미의 말이었다.
둘이 다리 밑을 내려보았을 때 하천 돌다리에는 민혁이 서있었고 공책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민혁이 그 노트를 잡은 것이었다. 종석이 "고맙다!" 고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예진과 민은 다리 위로 다시 올라갔고 종석과 선미는 보도를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넷이 만났고 민혁이 공책을 건내 주었을 떄 종석은 말했다. "깊은 물길이 우리를 잠기게 할 지라도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킨다."
민혁이 대답했다. "개 지랄 똥을 싸네." 그러거나 말거나 예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우리들의 플랜이었다.
넷은 토익시험을 보았다. 예진은 만점을 받았고 그 다음으로는 민혁이, 선미가 그 다음이었고 종석은 민혁의 생각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았다. 각가 점수에 만족했든 아니든 이 모임은 한번의 토익시험을 목표로 하여 존재하였고 존재의의가 끝났기 때문에 스터디는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