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이군요."
거무죽죽하게 때가 탄 지도 위에 정이십면체 주사위들이 굴려졌다.
"지지리도 운이 없군!"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야유를 던지며 실소를 터뜨리는 사이 주사위를 던진 이는 묵묵히 지도 위에 기물을 하나 올렸고, 그것은 스스로 부정한 기운을 발하며 한구석에 놓였다.
"후방에 하급 기물을 배치하시다니, 이건 버리는 패요, 선언하는 꼴이 아닙니까?"
맞은편에 있던 이가 난색을 하며 빈정거리자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묘한 웃음으로 흘릴 뿐이었다.
"과연 어떨는지요...?"
메뚜기 형상의 기물이 깔고 앉은 지도의 평야 지대가 거무스레해졌다.
*
산맥을 낀 들판을 가로지르는 굽이굽이 난 강과 그 너머 울창한 삼림, 그곳에 있는 평야와 근처 작은 촌락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며 황충 무리가 들끓기 시작했다.
새파란 하늘을 뒤덮은 무리의 행선지는 다름 아닌 촌락의 헛간, 그 안에 뉘인 주검 한 구였다. 해충은 썩기 직전의 살덩이를 게걸스럽게 파먹었고 잔치를 즐긴 그들의 불쾌한 날갯짓 소리가 잠잠해질 즈음 인영이 하나둘씩 헛간에 가까워졌다.
"이게... 뭐야...?"
"성공...한 건가...?"
"선생님께선 열흘 남짓 걸릴 거라 하셨는데, 지금은 너무 이르지 않나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이건 파리가 아니라 메뚜기잖아!"
그들이 찾아간 주검은 뼈에 살점이 아닌 메뚜기 떼가 달라붙어 이리저리 헤엄치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체모 대신 난 더듬이와 키틴질의 거죽은 등잔불에 반짝거리는 것이 기괴할 정도로 이질적이니 그를 둘러선 이들은 기대와는 다른 모습에 선뜻 다가가지도 못하고 제각기 다른 반응을 내비칠 뿐이었고 메뚜기가 여성을 향해 폴짝 뛰어오르자 그녀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고 풀썩 주저앉았다.
남자가 탄식하는 순간 꿈틀거리는 주검이 고개를 들었고, 그를 둘러선 이들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했다.
"무슨...."
주검이 입을 떼자 로브를 눌러 쓴 사내가 용기를 내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앤 선생님, 다시 뵙게 되어 정말 좋습니다."
주검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누구십니까?"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온 주검의 물음에 사내의 굳은 표정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선생님, 저희를 몰라보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앤이 아닙니다."
앤이라고 불린 주검이 부정하자 그의 손님은 좌절하여 일제히 주저앉았다.
"앤 선생님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뼈가 듬성듬성 보이는 메뚜기로 된 손이 제 턱에 닿았다. 주검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고 실망한 손님을 향해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정리했다.
살아있을 적 이름과 기억은 떠오르지 않지만 나는 당신들이 찾는 앤과 같은 망자라는 것, 그러나 자신은 앤이 아니라는 것.
"누누이 말하지만 저는 앤이 아닙니다. 왜 저를 보고 계속 앤이라 하십니까?"
"앤 선생님께선 운명하시기 전 무리의 부름이라는 주술을 자신에게 걸고 필멸을 초월하여 민중의 비원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죠. 결국 실패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왜 저입니까?"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앤이 말을 끊고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보채지 말고 들어보십시오."
"파리 떼에 육신을 주고 구더기의 무리로 되살아나는 주술이라 압니다만 지금 당신을 보면 파리는커녕 구더기도 아니고 심지어 되살아난 것조차 아닙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선 왕립 마술사셨고 비록 실패하셨지만 그 비술을 다룰 수 있는 자는 그 말곤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앤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앤은 구더기 대신 메뚜기 옷을 입은 흉물스러운 자신의 몰골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고뇌에 빠진 것은 눈앞에 있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말을 삼키고 생각을 정리한 뒤 뱉었다.
"선생님께선 이런 변방까지 혈혈단신으로 오셔서 마물과 강도로부터 이 마을을 지키셨습니다."
"미안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주술로 되살아난 주검이 생전의 의지를 이어 마을을 지켜줄 것이라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까?"
앤은 기가 찼다. 아니, 곱게 죽지 못한 것도 신께 죄스러운 마당에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나더러 앤이라 하곤 마을을 지키라는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를 하다니, 참으로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잠시 밖에서 바람을 쐬고 싶습니다."
헛간을 나서니 착찹한 가슴에 늦여름의 서늘한 밤바람이 불었고 분명 메뚜기가 꼬일 시기는 아니었다.
"빌어처먹을...."
"오, 선생님...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어두운 헛간 안에서 추종자들의 욕지거리와 탄식이 흘러나왔고, 동시에 앤도 나올 리 없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먼 풍경을 바라보았다.
육신은 진작 황충의 양분으로 사라졌고 꿈틀거리는 해충의 총체만이 사람의 모양새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꼴이니 나는 사람 아닌 괴물이다.
악몽이라면 어서 깨어나면 좋겠군.
*
산 자는 휴식을, 죽은 자는 인식을. 그렇지만 되살아난 자는?
그루터기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진 앤은 여명이 밝아옴에 정신을 차렸다.
이런 몸뚱이라고 해서 햇볕이 불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로군.
대지에 온기가 감돌자 먼 발치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푹 눌러쓴 로브와 턱 밑으로 내린 긴 머리를 보고 그녀라는 사실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앤, 소식 들었습니다."
그녀가 끔찍한 모습을 한 괴물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붙였다.
"저는 앤이 아닙니다."
일순간 그녀의 낯빛이 흐려지더니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불쌍한 앤. 하지만 상관 없습니다. 그에게는 따로 부탁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대신 당신이 절 도울 수 있을까요?"
앤은 등을 돌려 오두막과 헛간을 보았다. 마치 주검처럼 덩그러니 남은 쓸쓸한 건물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무례합니까?"
"물론 대가가 있습니다. 아주 큰 대가가."
앤은 기가 찬 듯 여성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능글맞게 웃으며 그의 태도를 살폈다.
긴 속눈썹과 오똑한 코, 맑은 눈, 살짝 보이는 길쭉한 귀를 가진 그녀는 어여뻤지만 속에 무시무시한 독을 가진 뱀이 똬리를 틀고 있으리라.
"전 도라예요."
"그래요 도라, 나에게 무엇이 필요할 것 같습니까? 죽었다가 이런 흉측한 몸뚱이로 되살아난 괴물에게 무엇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까?"
*
그 남자가 앤을 찾은 것은 정확히 이틀 뒤였다.
앤은 로브로도 감출 수 없는 흉악한 외모 탓에 자연스럽게 햇빛을 피해 궁상맞게 헛간에서 시체처럼 앉아 시간을 축내며 하염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내피까지 뒤덮은 메뚜기 떼가 일제히 날개를 펼치자 그는 헛간 안으로 누가 왔음을 깨달았다.
"앤 선생님,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그는 혼자였다.
"당신은 나를 선생이라 부르면서도 나를 후덥고 습하고 쥐와 벼룩이 끓는 헛간에 이틀간 방치하길 꺼리지 않으십니다."
남자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잠깐 같이 걷지 않겠습니까."
덥지만 화창한 날이었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 가을이 다가옴을 암시했다.
"매년 이맘때쯤만 되면 저 멀리 산에서는 도적이 내려오고 강 건너 숲에서는 마물이 올라옵니다."
둘은 밭을 피해 푸른 초원을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도적에게 돈을 주지 못하면 여자를 주어야 하고 마물은 돈을 원하지 않으니 제멋대로 피와 고기로 된 광란의 파티를 즐기다 사라진답니다."
두리번거린 마을은 평화롭고 사람들은 강녕하니 앤은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전부 앤 선생님 덕분이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그제 저희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을 그곳에 내버려둔 것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선생님을 극진히 모신 저희조차도 겁에 질렸는데 다른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이틀이 지난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유하고 차분한 사람의 전형이었다.
"주술이 실패한 것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앤, 당신은 어쨌든 살은 이상 계속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앤은 헛간을 나서고부터 그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갑자기 바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신은 무척 강하시지만 어디에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되살리는 것은 금술이었기에...."
"...."
"다만 저희라면 당신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겠습니다. 그들도 분명 이해하겠지요. 당신이 앤 선생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면!"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앤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앤, 당신의 마음을 잘 압니다. 주술이 실패하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어중간한, 그리고 흉측한 모습이 되었고 기억까지 잃으셨나니 혼란스러운 것도 백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당신의 지금 모습보다 그때 보여주신 마을을 향한 헌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안합니다."
그는 약간 조급해졌는지 말이 빨라졌고 언성을 높였다.
"앤 선생님께선 이 아름다운 마을을 사랑하시어 두 번째 고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젠 가족과 다름없는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향의 풀잎도 당신의 귀향을 반길 겁니다.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개선입니다, 개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는 하아, 한숨을 내쉬면서 앤을 노려봤다.
"앤, 당신이 없고 나서 외적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와 여자에 굶주렸습니다. 이번에 오는 적들은 그간의 복수를 하듯 무자비할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미 이틀을 주지 않았습니까!"
옳거니! 이 남자도 뱃속에 뱀을 키우고 있구나!
"당신은 어린아이들이 날카로운 이빨에 찢겨 비명을 지르고 남편 있는 여자가 산속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
남자는 열을 식히고 다시 차분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생사가 달린 일이라 그만 성을 내버렸습니다. 저희처럼 늘 위협에 시달리는 사람은 안녕과 질서를 추구하는 데 가책이 없다는 것을 믿어 의침치 않습니다."
앤은 화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
"모르는 게 많습니다. 하나 물어도 됩니까?"
"예."
"혹시 도라라는 여자를 아십니까?"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그는 겁에 질린 듯 사색이 되어 극도로 긴장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닙니다. 하아.... 그녀가 당신을 찾았습니까?"
"자길 좀 도와달라고."
그는 진중한 표정이 되어 앤을 똑바로 마주 보고 말했다.
"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속아 넘어가선 안 됩니다. 절대로!"
앤은 그가 왜 저렇게 격양된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원래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원문: https://www.neolabo.co.kr/free/4021194
맛있어서 게걸스럽게 줏어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