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무죽죽하게 때가 탄 양피지 위에 정십이면체의 주사위들이 굴려졌다.
“8이군요“
”하급 기물, 지지리도 운이 없군..!“
원탁에 둘러 앉은 이들이 저마다 실소를 터트렸다.
주사위를 던진이가 양피지 위에 기물을 하나 올려 놓자 손에 닿았던 기물은 부정한 기운을 뿜으며 구석에 배치되었다.
”후방에 하급 기물을 배치하는건 너무나도 노골적인 버림패가 아니겠습니까?“
”과연 어떨런지요..?“
맞은편에 있던 이가 난색을 표하며 빈정거리자 그는 웃음기를 띈 얼굴로 떠보듯 흘려 넘겼다.
기물이 놓인 양피지는 지도였다.
산맥을 낀 평야를 가로지르는 비좁은 강과 그 너머의 울창한 산림
그곳에 있는 평야와 근처 작은 촌락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며 황충무리가 들끓기 시작했다.
무리의 행선지는 촌락의 헛간, 그 안에 뉘여져 있는 어느 주검 위에 하나 둘 씩 앉아 썩기 직전의 고깃덩이를 파먹으며 연회를 즐겼고 벌레들의 불쾌한 날개짓 소리가 잠잠해질즈음 어둠속에 있던 인영이 하나 둘씩 헛간에 가까워졌다.
”성공.. 한건가..?“
”선생께선 열흘남짓 걸릴것이라 하셨는데.. 지금은 너무 이르지 않나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이건 파리가 아니라 메뚜기잖아“
그들은 각자의 감상을 탄식하듯 흘렸다.
그 순간 꿈틀거리는 메뚜기에 뒤덮인 주검이 고개를 들고 일어섰고 주검을 둘러선 이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치며 소리를 지르거나 구역질을 하며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 무슨..“
메뚜기에 뒤덮인 주검이 입을 때자 로브를 눌러 쓴 한 사내가 그 주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앤 선생님 다시 뵙게되어 정말 좋습니다.“
주검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을 잃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겁니까?“
주검이 오랜 침묵을 깨고 무릎을 꿇은 사내에게 되묻자 사내의 굳은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선생, 저희가 떠오르지 않는것입니까?“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는지 사내가 작금의 사태를 부정하듯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앤이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는데 저도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
주검이 부정하자 앤이라는 이의 추종자들은 절망하며 주저앉고 탄식을 흘렸다.
“앤 선생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메뚜기로 가득 찬 가죽속에 뼈가 듬성듬성 보이는 손이 주검의 턱에 닿았다.
고뇌하는 듯한 자세였다.
“마지막으로 대답하고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주검은 자신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이야기를 정리했다.
생전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지만 자신이 앤과 같은 망자라는 점, 그리고 자신은 앤이 아니라는 점
“앤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왜 저인겁니까?“
”앤 선생께선 문둥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시기전 무리의 부름이라는 주술을 자신에게 걸고 필멸을 초월하여 민중의 비원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죠, 결국 실패한것같습니다만..“
”그래서 왜 저입니까?“
”보채지 말고 좀 더 들어보십시오“
초조해진 주검이 말을 끊고 되물었다.
”파리떼에 육신을 주고 구더기의 무리로 되살아나는 주술이라 하셨는데 지금 당신을 보면 구더기도 아니고 되살아난것도 아닙니다.“
그 점에선 확실히 실패했다고 느낄수 있었다.
”그래서?“
”선생은 왕립마술사셨고 이런 변방까지 단신으로 오셔서 인외의 마물들과 도적무리들로부터 이 마을을 지키셨습니다.“
추종자는 잠시 말을 삼킨 뒤 생각을 정리한 듯 이어나갔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은 주술로 만들어진 주검이 생전의 의지를 따라 마을을 지켜줄것이라 하셨는데 무언가 느끼지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까?“
주검은 기가 찼다.
참으로 편리하고 일방적인 이야기였으며 그 앤이라는 작자도 그저 값 싼 동정과 도덕성에 취해 약자라는 이들에게 착취당하는 머저리였을 뿐이라고 주검은 생각했다.
”밖에서 잠시 생각을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육신은 진작 메뚜기들의 양분으로 사라졌고 그 무리가 꿈틀거리는 존재가 사람의 모양새만을 간신히 유지하며 문을 열고 걸어나갔다.
”빌어쳐먹을..“
”선생님..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열린 문틈 사이로 추종자들의 욕지거리와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은 착잡해진 마음에 나올리 없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먼 풍경을 바라 보았다.
밖은 어두운 밤이었으나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였고 바람이 차게 느껴졌으나 불쾌히 느껴지지도 않았다.
‘악몽이라면 빨리 깨어나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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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는 휴식할 수 있고 죽은 자는 안식을 얻지만 죽었다가 되살아난 자에겐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괴물은 여명이 밝아오는 것에 정신을 차렸다.
’이런 몸뚱이라라고 해서 딱히 햇볕이 불쾌하진 않군‘
땅에 볕과 온기가 감돌자 먼 발치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푹 눌러쓴 로브와 턱밑으로 내린 긴 머리를 보고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만을 짐작케 하였다.
”앤, 소식 들었습니다“
로브를 뒤집어쓴 여성이 끔찍한 몰골을 한 괴물에게 서스럼없이 말을 붙였다.
”저는 앤이 아닙니다.“
”저런.. 실패했나 보군요.. 불쌍한 앤.“
일순 여성의 낯빛이 흐려지더니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뭐 당신이 앤이 아니더라도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 앤에게는 부탁했던 일이 있었는데 대신 당신이 절 도울수 있을까요?“
”이곳의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무례합니까?“
”물론 댓가가 없진 않을겁니다.“
괴물은 기가찬 듯이 그녀을 바라보았고 여성은 능글맞게 웃으며 주검의 태도를 살피는 듯 했다.
”나에게 무엇이 필요할 것 같습니까? 죽었다가 이런 몸뚱이로 되살아난 괴물에게 무언가 필요할것이라 생각합니까?“
30분동안열심히썼다근데퇴고를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