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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야경을 뚫고 모노레일이 내달린다. 허공에 매달린채 나아가는 부유감 탓에

아직도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기분이였다.

 

창밖을 내다보며 잇시키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휴우……. 실패네요…."

 

"아니, 너도 지금 하야마한테 대쉬해봤자 

가망이 없다는 것 쯤은 알았을 거 아니냐?"

 

창밖의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잇시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 걸요. 가슴이 뜨거워졌으니까요."

 

"뜻밖인데. 넌 그런 식으로 주위 분위기에 

휩쓸리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만."

 

내 대답에 유리창에 비친 잇시키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저도 뜻밖이었어요. 좀 더 냉정할 줄만 알았거든요."

 

"그러게나 말이다. 연애 생각밖에 없는 척하지만, 

사실 넌 상당히 영리한 편이랄까…."

 

부연설명을 하려는데, 잇시키가 불쑥 이쪽을 돌아보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제가 아니라… 선배님 말이에요."

 

"엉?"

 

또다시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튀었다. 어느새 화제가 바뀐 걸까.

아니면 선배라는게 혹시 다른 선배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난 왜 그냥 선배라고만 부르는 거지…?

 

잇시키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잇시키가 후훗 미소 지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마음이 움직이는 법이라고요?"

 

"뭐가."

 

내 질문에 잇시키가 엄숙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잡더니,

등을 꼿꼿이 펴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 저도, 진실된 것이 갖고 싶었거든요!"

 

그 대답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때가 떠올랐다

 

.

.

.

 

"그래도 나는…. 나는. 진실된 것을 원해."

 

눈시울이 뜨겁다. 눈 앞이 흐릿하다. 숨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열어 복도로 나갔다.

 

그러자 문 바로 앞에서 바짝 굳어 있던 사람과 딱 마주쳤다. 

잇시키 이로하였다..

 

"아, 선배님… 그, 그게요, 부르려고 했는데요…."

잇시키가 당황한 기색으로 둘러댔지만,  잇시키와 입씨름을 벌일 때가 아니였다.

 

"이로하, 미안.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잇시키가 뒤에서 불러 세웠다.

"서, 선배님! 오늘은 모임 없어요! 그 말씀을 드리려고…. 그, 그리고―"

 

"어, 알았다."

적당히 대꾸하고 뛰어갔다. 

 

자그마치 몇일전 일이다.

 

회상 끝.

 

.

.

.

 

저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듣고 있었냐…."

 

"가만 있어도 다 들리던데요?"

 

태연자약하게 대꾸하는 잇시키에게 조금 처량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잊어주라."

 

"잊지 않을 거에요. …잊을 수가 없어요."

잇시키의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진지했다.

 

"그래서 오늘 부딪쳐보기로 마음먹은 거에요."

 

내 부족한 말주변으론 변변한 위로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애써 잇시키에게 해줄 말을 찾았다.

"저, 그 뭐냐. 신경 쓰지 마라. 네 잘못도 아닌데 뭐."

 

그러자 잇시키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스슥 몸을 물려 내게서 떨어졌다.

"뭐예요. 상심한 틈을 노려 꼬시는 건가요? 죄송해요 아직은 좀 무리에요."

 

"아니라고…."

 

조금 어이없어 하는 사이 잇시키가 헛기침을 하고는 도로 아까만큼 다가앉았다.

"뭣보다 아직 끝난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이거야말로 하야마 선배를 함락시키는데 유효한 방법이라구요.

모두들 저를 안쓰럽게 여길 테고, 주위에서도 배려해줄거 아니에요~?"

 

"…어, 응, 그, 그래. 그런 거였냐."

 

감탄과 황당함이 반반씩 뒤섞인 기분으로 대꾸하자,

잇시키가 에헴 가슴을 펴며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차일 걸 알면서도 시도해봐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에요.

그리고 또 있어요. 거절한 상대한테는 은근한 마음이 쓰이죠? 아무래도 측은하게 여기게 되잖아요.

미안한 기분이 드는 게 보통이죠. 그러니까 이번 패배는 발판이에요. 다음에 유리하게 써먹기 위한

그러니까, 그… 열심히 해야…."

 

끅끅 나직한 흐느낌이 새어나오며, 

눈가에 그렁그렁 이슬이 맺힌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열심히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코마치 이론으론 그럴땐 사랑한단 한마디면 족하다 했지만, 그건 여동생 전용 대사다.

안되면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동생 전용 커맨드다.

 

"대단하구나…. 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러자 잇시키가 물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빼꼼 올려다 보았다.

"다 선배님 때문이라고요. 제가 이렇게 된거요."

 

"…아니, 학생회장이 된 건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하지만 잇시키는 그 항변을 듣지도 않고, 

내 귓가에 얼굴을 가져대 대며 속삭였다.

 

"책임, 져주실 거죠?"

 

그리고 내 후배는 앙큼한 표정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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